멘사 교육분과 학부모위원장의 자녀교육 성장수기를 원본으로 올립니다
[나는 외계인의 아버지였다] 2004. 5월 월간조선 특집 원고
새벽 3시.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가볍다.
원하는 정보를 웹서핑으로 찾아냈기 때문이다. 새벽 3~4 시에 잠자리에 드는 야행성 버릇은 벌써 십 수 년 동안 길들여져 마음에 붙어 떼어낼 수 없는 송진과 같다.
결혼 전, 영재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낮에는 서점과 도서관에서, 밤에는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검색으로 영재 관련 자료와 교육방법 학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 고등학생을 교육하면서 영재아로 인정받을만한 아이들이 단지 학습 영재로서 우수한 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과 자신의 재능과는 무관한 전공 선택으로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고자 했다.
나 자신도 어린 시절 국민학교 입학 전 구구단을 이용한 곱셈을 할 정도여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재로 알려졌었고, 중학 시절에는 두뇌 덕분에 하루 이틀의 벼락치기 공부로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고교 진학 후 우수한 집단에 속하면서 첫 시험에 반에서 59 명 중 43등을 하는 충격적인 사건 이후 성적 변화도가 43->33->15->9 (고1 반석차)->8->7->5->2등(고2 전교석차)으로 향상된 것으로 보아 나도 분명히 학습영재였던 셈이다. 나는 이 기록이 적힌 성적표를 지금도 지니고 있는데, 성적으로 고민하는 아이들에게는 백효 특약이었고, 내 자식들에게도 아빠표 우황 청심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보물지도처럼 간직하고 있다.
나는 영재 교육의 전문가가 아니다. 한국의 영재교육이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를 바라는 한 아이의 부모로, 직접 체험한 것들을 공개하는 이유는 전문가나 영재아를 둔 부모에게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내가 언급한 내용들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며 하나의 체험일 뿐, 공개 토론의 대상이 아님을 밝힌다.
1992년 3월, 아들인 준영이가 태어나면서 3 년 전부터 준비해온 영재교육을 실제 적용해 볼 기회가 찾아 왔다.
전체적인 구도는 11 단계로 나누어 단계별 기간을 각각 1년 단위로 하는 5 년차 계획과 단계별 기간을 2년 단위로 하는 6년 차 계획으로 초등 졸업까지의 장기 가변 프로젝트였다.
첫 단계는 독일의 칼비테 0세 교육의 장점과 해마 교육법을 한국적 정서와 결합한 방식이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 영재 교육에 대비한 부모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확고해야 한다.
일반적인 태교 방식을 따랐지만 태아가 엄마 배속에 있어도 나는 늘 내 곁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행동했고, 아내가 임신한 것을 안 바로 다음 날 나는 담배와 술을 끊었다.
준영이가 태어난 직후부터 오감을 이용한 교육과 우뇌자극 교육을 시작했다. ‘모든 아기는 천재다‘ 라는 학설과 ’영재는 만들어진다‘는 학설의 공통점은 같다. 이 때의 교육과 자극은 잠들지 않은 짧은 시간에 아이의 기분과 정서를 정확히 판단하고 자연스럽게 지나가듯이 부담없이 이루어져야한다.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 갈아 주는 일, 힘이 들어도 스킨쉽을 위하여 반드시 안아서 재우는 일 등은 아이와의 정서적 감정공유를 위해 내가 반드시 할 일 이었다.
칼비테 목사의 0세 교육은 철저했지만, 나의 방식은 철저함 대신에 아이의 감정과 환경에 따른 아이 중심의 교육이었고 정서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 교육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백일 잔치를 축하하러 온 친지들을 보며 아들이 옹아리로 하는 감정 표현을 나는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 감정을 친지 분들께 설명하면 의아해 하면서도 신기해 했다. 나와 대화(체화: 온몸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대화법)를 나누던 중 갑자기 정색을 하며 4~5 분간 계속된 옹아리와 함께 손과 발로 표현한 내용은 내게 놀람과 기쁨이었다.100 일 동안 내가 계획하고 아들과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을 순서대로 기억해 낸 것이다.
나는 마치 컴퓨터 파일이 순서대로 열리는 착각에 빠졌을 정도였다. 그 옹아리가 끝난 후 아들 녀석은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100일을 자축하고 있었다.
칼비테 목사의 교육은 현대적 영재교육 관점에서 바라볼 때 구시대적 교육 방식이며 일본의 대표적인 우뇌자극 프로그램인 시찌다 연상 방식으로 계승되고 글렌도만의 비츠교육법인 두뇌향상 연상 카드로 이어지는데, 나는 이 연상방식에 한국적 정서와 감각을 첨가한 교육법을 만들었다.
칼비테 목사의 아들이 13세의 나이로 수학 및 철학박사 학위와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8세의 나이로 대학교수가 되었지만 그 아들의 정서와 세상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훌륭한 삶을 마쳤다는 사실과 아버지의 철저한 계획과 연구가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 0세 교육의 적합한 모델로 칼비테 교육을 선택한 동기였다.
이와 같이 잘 딱여진 터 위에서 3 년간의 교육은 보통아이 10년의 교육 효과를 능가했다.
동화에 대한 분석적 이해와 초등학교 3~4학년 국어 교과서를 어려움 없이 이해했고, 수학과 초보적인 과학 원리이해를 위한 학습놀이에도 적극적이었다. 나는 이 자료를 준비하고 선별해 내기 위해 거의 매일 대형 서점과 인터넷 학습 자료실을 찾았다. TV 시청은 반드시 녹화된 장면을 편집하여 대화와 책을 통한 놀이와 학습 후에 적합한 자료들만 보도록 했다.
(이 과정이 준영이를 교육하는 방법의 핵심인데, 일반 부모들에게는 대단히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이를 위해 비디오를 두 대 장만했고, 캠코더를 준비했는데, 평균적으로 학습시간은 하루 한 시간 정도였고, 주말 이틀간은 학습을 하지 않았다. 바로 이 주말에 야외로 놀러가 캠코더로 촬영하고 밖에서 보았던 장면을 편집하여 두뇌의 회상 능력과 연상능력을 키우고, 대화와 상상을 유도하며 자연스럽게 좌뇌 자극을 통한 논리적, 창의적 학습이 되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학습효과가 아니라, 아들의 감정과 정서의 변화였다.
나 자신도 처음에 확신할 수 있는 자료도 없었고, 만약 정서불안이나 건강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 내 아이를 위해 영재교육을 무조건 중단한다는 절대조건이 있었다. 다행히 나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인정할 만큼 순수하고 영리한 아이로 성장했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타인에게 선의적인 마음으로 다가가며, 남을 이해하며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성장했고, 무엇보다도 지난 12 년간 아무 탈 없이 최상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3세 이전 유아기일 때 특별한 예절 교육을 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작은 꾸지람도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 향상에 방해가 된다는 신념아래 말보다 보고 느끼며 행동하는 아이로 키웠다.
이 때 적용한 교육법은 환경과 경험을 통한 자율의 교육인 영국의 서머힐 교육법을 기본으로 은물 교육인 프뢰벨, 인지능력 발달은 동화와 조절로 인한 단계별 교육이라는 피아제 교육법 중 아이에게 맞는 선별과 통합으로 새롭게 구성된 교육 방식을 적용했다.
아들의 영재성을 어느 정도 확신한 나는 처음으로 영재교육기관을 찾았다.
객관적 검증과 시행 착오에 따른 보완 수정을 위한 단계였다. 교재를 구입해야 등록이 가능했고, 지금으로부터 10 년 전에 30 만 원 이상을 납부하고 등록을 마쳤다. 일본의 영재 교육법 중 하나로 기억하는데 교육과 학습이 일방적이며 계속 반복 되는 연상 기억법은 아이를 힘들게 했다.
나는 등록한지 일주일 만에 영재 교육원의 학습을 중단했고, 정서 교육을 위해 유치원에 2년 조기 입학을 하였으나 3일 만에 또 다시 중단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몇몇 안 되는 사설 영재 교육원은 상업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개인 차와 적성을 무시한 집단적 교육으로 효율성이 적고 실험적인 이이템만 즐비했다.
인터넷을 통해 홉킨스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영재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신문을 통하여 하버드 대학에서 영재학을 전공하신 조석희 박사의 집필로 만들어진 창의력 중심의 교재를 영재교육학술원(KAGE)에서 구할 수 있다는 소식에 그 곳을 방문했고, 영재 판별 테스트를 거쳐 1 년 3 개월간 창의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3 단계 도움을 받았다.
언어와 수학 ,사고력, 과학1,2를 자신보다 두어 살 많은 영재아들과 무리 없이 마칠 수 있었다.(이 교육원은 만 5세 이후로 입학자격이 주어졌지만, 그 때 예외 조치로 입학이 허가 되었는데, 그 때가 만 4세가 조금 안 된 때였다)
유아를 위한 테스트에서 사고력, 창의력 등 5 개 전 분야가 거의 만점인 99 % 이상으로 판정(최고 한계점이 99%)을 받고, 나는 다음 단계의 교육을 위해 영재 교육원 수료를 결정했다.
교육원 수료 후 6 개월 간 미시적 학습법을 거시적 방법으로 전환키 위해 자연과 친숙해지기 위한 방법을 택했다. 산과 강, 그리고 바다를 일주 1회 정도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을 했는데, 미술관과 박물관은 미시적 학습법으로 간주해 찾지 않고, 전집류로 된 화보나 책으로 대신 했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해 근처 놀이공원(L 월드)에 언제나 갈 수 있는 가족 연간회원권을 구입하여 연 30 회 이상 드나들어 준영이는 자기 집 정원으로 여길 정도였다. 한강 잠실 고수부지는 우리 집 운동장이었다.
자연과의 교감은 인간 성격 형성에 필요한 요소지만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그 효과를 얻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나의 교육 프로젝트 1단계 4~ 5년차 교육의 핵심이었다.
준영이가 만 5세가 될 무렵 6개월의 학습 기간을 정해 수학 중심의 초등 교과과정을 지도해 보기로 했다.
이 과정은 나의 단계별 프로젝트에 없던 것인데, 수와 관련된 학습에서는 보다 의욕적인 모습과 관심을 가져 체계적인 창의성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3~4 학년 이상의 학습 능력이 있다는 판단으로 일 개월에 한 학년 과정을 학습하기로 했다.
초등 1학년 수학 교과서와 익힘책(문제집)을 저녁 무렵 서점에서 구입하여 그 다음 날부터 계획에 따라 학습하기로 했다. 그 다음 날 저녁 귀가하여 저녁 식사를 한 후 교과서를 집어든 나는 책이 부풀어 올라 있고, 새 책이 헌 책이 된 듯한 느낌에 책을 펼쳐 보았다. 문제 마다 답이 적혀 있었고, 특히 나를 기쁘게 한 것은 마지막 쪽수에 적혀 있는 깨알 같은 글씨였다.
‘아빠 힘들까봐 내가 먼저 책을 읽고 문제도 다 풀어 놓았어요’
이 날 이후 준영이는 책을 혼자 보고 이해한 후 질문과 토론하는 창의적 학습 방식에 따라 초등 수학 과정을 마무리 하는데 4 개월이 걸렸다.
교육 프로젝트 1 단계 마지막 5년차의 핵심은 인간 관계였다.
사회적인 인간은 다른 성격의 인간보다 우위에 선다. 창의적 인간으로 정의되는 ‘유희의 인간’은 사회성이 없으면 고독하고 불행한 삶을 살 확률이 높고 영재나 천재에게 흔히 나타난다고 한다. 이 같은 인간형의 원류는 유아기 환경과 교육방식에 따라 좌우된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의 교육 풍토와 사회적 여건은 영재아를 교육하기는커녕 선발할 능력도, 관심도 없었다. 그 만큼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 양성보다 사회적 이슈와 정치적 득실에 따라 교육은 평균적 정의의 평등을 ‘평준화’라는 이름으로 명명하여 영재를 범재로 만드는 주범이 되었다.
우려와 고민 끝에 유년기 유학을 권유하는 분들의 의견을 뿌리치고 유치원에 등록을 했다. 유치원 등교 첫 날부터 적응이 안 되었다. 반복되는 글자 연습과 율동과 엄격한 듯한 집단 환경에 스트레스를 느낀 듯, 그 다음 날부터 유치원 등교를 거부했다. 유치원 다닌 지 3개월 만에 ‘유치원은 같은 또래의 놀이터’로 인식하면서 서서히 적응하는 아이로 자랐다. 유치원에 다니면서 중학 수학 과정을 6개월 만에 마무리하고, 이어서 고교 수학 정규 과정을 8개월 간 학습함으로서 준영이의 논리적 사고력과 창의성은 기대치를 웃돌았다.
교육 전문가나 심리 및 정신분석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나의 의도는 매우 위험한 발상과 시도이고, 지적인 능력과 정서 차에서 오는 괴리감으로 아이에게 큰 부담과 상처를 주는 비교육적 방법이라 말 할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일반적인 이론에는 100% 동감한다. 그러나, 중 고등 교과과정은 각 개인의 지적 능력차에서 분류된 것이 아니고 같은 또래의 평균적 능력을 바탕으로 분류되어 평균 기대치를 훨씬 상회하는 영재아에게는 따분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신적 심리적 공황기를 만들어 내는 애물단지가 되기 쉽다.
선행학습은 일반적으로 아이의 창의력을 감소시키며, 현실적으로 공교육 현장인 교실을 부정하는 학습형태로 많은 비난을 받는다. 교육 이론이 교육 현실을 선도해야 하지만 교육 환경이 산으로 가는데 교육 이론은 바다를 향하여 ‘고래 잡으러!’를 외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초등 교육과정은 인간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영재아 발굴과 교육에 쏟는 관심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나라의 영재 교육은 매우 초보적이며 실험적 단계다.
이 경우, 준영이의 중 고등 과정 학습은 엄밀히 말해 선행학습이 아니며, 오히려 지적 능력에 따라 최적화된 학습법으로 오랜 기간 관찰과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 분야에서는 심화 학습을 병행 했고, 관련 서적을 구하여 적합한 시기에 읽도록 했다.
원리를 이야기 중심으로 엮은 심화 과정의 편집된 책을 찾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는데 요즈음은 관심도에 비례하여 관련 서적이 서점에 봇물처럼 넘쳐난다.
수리 영역의 편중은 오히려 다양한 사고력과 창의성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 아래 학습과정 속에 우리나라 역사와 과학 도서(리투스 백과, 과학동아, 뉴우톤), EBS 과학실험, 과학비밀상자(프랑스,36개 실험군) 등을 포함시켰고, 특히 영어 학습은 비디오와 TV 시청으로 귀를 열리도록 한 후 원어 명작동화와 중학 교과서영어, 그리고 영어성경을 읽고 들으며 언어라는 개념보다 외국인의 다른 의사표현으로 이해하도록 힘썼는데,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어려움 없이 프로그래밍 버그를 수정하고, 원서 독해에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을 보면 절반의 성공은 이룬 셈이다.
유치원을 조기 수료한 후 초등학교 입학 까지는 일 년이라는 기간이 남아 있었다.
이 기간 중 핵심 과제는 다독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준영의 1차 관심도를 찾아내는 일 이었다. 집 근처 대형 서점 두 곳을 정하여 주일마다 번갈아 찾아 가며 상당량의 독서를 했는데, 내가 선택한 도서와 준영이가 선택한 도서 각 각 한 권 씩 읽는 서점 투어였다.
나는 경험상 미래 지향적인 직업군으로 분류된 유전 공학이나 천문학 관련 도서를 권했고, 집에서도 그와 관계된 실험도구나 놀이 도구( 레고 제품도 우주 정거장 조립)를 의도적으로 배치하며 관심을 유도 했다.
그 해 여름 어느 날, 아들이 선택한 분야를 존중하겠다는 약속 아래 아들과 대화를 나눈 뒤 녀석이 선택한 분야는 그리스 로마 신화 연구와 컴퓨터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에 나는 당황했고, 선택한 이유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었다. 서점 투어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관련된 서적에 몰입했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컴퓨터는 준영이가 태어난 직 후 집에 설치되어 있었고 아들 스스로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등을 익혔는데 나는 학습 보조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좋아서...’ 였다.
하루는 북한산에 올라, 그 다음 날은 바닷가에서, 3일 째 되던 날은 한강에서 장고를 거듭하던 나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삶의 나침판을 역으로 돌리는 결단을 내렸다.
나는 외곬 문과 성향으로 이공계 분야와는 접목이 안 되는 눈먼 심봉사와 다를 바 없었다. 컴퓨터에 관해서도 당연히 문외한 이었고, 어떤 점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제 절반을 돌아 왔는데 컴맹인 나는 학습 프로젝트의 뒷 선으로 물러서야 하는가?
건널 다리가 없으면 온 길을 되돌아가거나 다리를 새로 놓는 방법이 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컴퓨터라는 낯선 괴물을 잡기 위해 호랑이 동굴 속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3 개월 간 대입 수능 준비에 몰두했고, 그 해 겨울 두개 대학의 입학 통지서를 받고 집과 거리가 가까운 대학 컴퓨터 관련학과에 입학했다.
준영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나는 대학 입학식에 신입생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아들과 함께 배움이란 공통분모로 집을 나서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대학 강의실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세대와의 교감과 교류는 진시황도 꿈꾸지 못한 젊은 에너지와 사고의 전환을 가져 왔고, 자유로부터 얻는 기쁨의 크기와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저녁에 대학에서 배운 내용을 정리하여 학습과 토론식 대화로 이끌었는데, 초등 일학년 재학 중 학습한 내용은 대학 1~2 학년 수준의 학습과정 이었다.
‘컴퓨터 구조론’, ‘이산수학’, ‘운영체제(OS)‘, ’프로그램언어인 C 와 Visual Basic', '정보통신개론‘, ’Database & SQL' 등이 주요 학습 내용 이었다.
체계적인 학습 점검을 위해 국가기술자격시험인 ‘워드 1급’ 과 ‘컴퓨터 활용능력’ 시험에 응시할 준비를 하던 중에 모의고사로 치룬 시험 결과가 만점에 가까워 이 시험 대신 상위 시험인 ‘정보처리기능사’ 와 ‘인터넷 정보검색사’ 시험에 응시, 아들과 나는 두 시험에 동반 합격하는 기쁨을 맛 보았다.
그 이듬해 대학 2학년 등록을 포기한 이유는 독학으로 컴퓨터 학습을 진행하는 준영이의 학습 진도와 습득 능력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죽마교우인 서강대 박성호 교수등의 자문과 각 종 세미나에 참석하여 얻은 자료와 관련 서적을 공급하는데 주력했다.
멀티미디어(Flash, Photoshop, Namo등 웹에디터)학습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 자신의 홈페이지( http://www.yaios.com )를 직접 만들도록 유도했는데, 웹에디터를 이용하지 않고 HTML tag를 10일 간 익힌 후 철저히 tag를 쳐 가며 꾸며 놓은 사이버 홈은 준영이가 프로그래밍을 완숙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홈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하루 만에 집 한 채 지을 수 있는 사이버 건축가가 되어 있었다.
자신과 관계있는 단체에 홈을 만들어 놓아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편이다. 준영이는 학교에서 지적인 것과 관련되면 자신을 낮추고 남을 돕는 위치에 선다. 그렇게 하도록 나는 지도했고 그 것이 준영이가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여러 개의 홈 운영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권장을 했다.
초등 2학년 6월 경. 소년한국일보와 한국멘사(MENSA : IQ 상위 2% 이내의 사람들이 모인 국제적인 단체)가 주관하는 제 1회 영재 선발대회에서 IQ 156 이상에게 수여하는 대상을 받으며 준영이는 한국 멘사 최초의 어린이 회원이 되었다. 매 달 어린이 회원들의 모임인 교육시그에서 멘사 회원인 선생님들과 창의력 중심의 수업을 받고 있는데, 이 모임의 가장 큰 장점이 같은 사고 방식과 행동이 제한받지 않고 초 중학생이 함께 어울리는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준영이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어린이 회원 중 상당수가 국가가 후원하는 대학 영재교육원에 재학 중이며 월 4~5일은 이런 분위기에서 그들은 성장한다. 나는 교육시그 학부모위원회를 만들어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는 모임을 주선하고 있다.
초등 3학년이 된 준영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20년을 거슬러 올라간 나의 대학 생활과 젊음의 상아탑에서 찾아낸 것은 자유였다. 인간 본성에 원시적으로 내재된 자유로움을 아들에게도 경험케 하고 싶었다. 앞으로 일 년 간, 어떤 계획도 없이 학습을 포함한 모든 것을 스스로 택하여 자유롭게 생활토록 했다.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참가한 수학경시대회 에서 대상, 영진.com 등에서 장학생 선발, 방송 출연 등등... 자그마한 사건들로 아들의 지갑만 두툼해져 갔다.
4학년 초반이 되어도 이 자유로움을 만끽하던 아이에게 강제적 회귀는 원치 않았다. 준영이가 스스로 선택하여 올인하는 모티브(동기)를 만들어야 했다.
2000년 6월. 한일 월드컵이 개최 되었고, 나와 준영이도 길거리 응원에 참여했다. 한민족의 단결 에너지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산 교육이 되었고, 준영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월드컵이 끝이 난 7 월 어느 날, 나는 아들의 마음을 읽고 월드컵을 기념할 수 있는 CD를 만들도록 권유했다. 자신의 컴퓨터 능력과 월드컵 기록물의 만남은 절묘했고, 다음 날부터 아들은 자료와 사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멀티미디어 CD로 만들기 위해 각종 Tool(웹도구)을 이용해 작업 보름 만에 시험 베타판 CD를 학교 친구들과 MENSA 회원들께 배포한 후 수정 보완을 거쳐 ‘2002 WORLDCUP MEMORIAL CD'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CD가 신문과 방송에 소개되면서 전국에서 CD를 보내달라는 메일에 아들의 메일창은 다운될 정도였다. 전국의 교육기관과 행정관서를 중심으로 1000 여 장의 CD를 발송했는데, 제작, 포장, 발송 등의 잡일과 비용은 모두 나의 몫이었다.(후에 아들도 지갑을 열었던 기억이 난다)
월드컵 CD 제작은 준영이가 컴퓨터와 재회하는 계기가 되었고, 분위기를 타면서 나의 절친한 친구인 시인의 시를 영상으로 제작한 ‘남명현 영상시집’ 과‘2002 대운동회 CD'도 제작 한 후 WMP(윈도우미디어플레이어)를 새롭게 구성한 작업도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에 몰두하게 되었다.
전주국제컴퓨터게임대회 창의보드게임 부문에서 우승, 장관상을 수상하고 상금 100 만원을 내게 쥐어 주며 하는 말이 나를 아연케 했다. “이제 빚 좀 갚았지?”
그 해 겨울, 과학 기술부 후원 대학 영재과학원에 입학하여 일년 과정의 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심화사사과정(2인 선정)에 선발되어 주말이면 교육원에 간다.
준영에게는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는 교육과정이 있다. 아들을 컴퓨터 부문 영재로 선발하여 일년 전부터 저명한 프로그래머이신 교수님과 그 팀으로부터 개인 사사를 받고 있는데, 3~5 년 간의 장기 프로젝트에 의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목적이다. 한국에도 세계적인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져 진정한 IT 강국을 만드는데 아들의 재능이 빛을 발하기를 기원한다.
학교에서 준영이의 별명은 외계인(ET)이다.
보통 아이들의 행동과 사고 방식이 많이 다르고,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아이에게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지금은 자신을 그룹에 동화시키는 능력도 있고, 눈 높이를 낮추어 친구들과 잘 어울린다. 전반적인 내 판단으로 ‘준영이의 학교생활 적응지수는 정상’ 이어서 생활면 보다 학습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썼다.
또한 초등학교에 재학하면서 내가 계획했던 학습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지 않았다. 출판 계약과 관련된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며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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